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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ow Must Go On

작년 말 로버트 드 니로와 앤 해서웨이가 출연했던 ‘인턴’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전문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화제가 됐다. 이 영화에서 앤 해서웨이는 창립한 지 1년 반만에 2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는 회사의 열혈 CEO로 출연했고 이 곳에 늦깎이 인턴으로 고용된 한 회사의 퇴직 임원, 로버트 드 니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열정으로 똘똘 뭉쳤지만 큰 조직을 운영하는 경험이 부족한 30세 여성 CEO 곁에서 연륜있는 인턴이 돕는다는 설정이 주는 아이디어가 참신한 영화였다. 최근 서울 도봉구에 위치한 한 패스트푸트의 최고령 일용직으로 화제가 된 인물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임갑지 할아버지는 직장 정년퇴직 이후 70대 중순부터 일용직으로 지원해 88세를 맞이한 올해까지 13년 동안 일주일에 3일 출근하며 현재의 삶을 즐기고 있다. 임갑지 할아버지가 하는 일은 어질러진 탁자와 바닥 정리는 물론 손님들이 사용한 쟁반과 컵을 깨끗하게 씻고 정리하는 일이다. 가게 입구를 청소하기도 하고 가끔씩 말썽을 일으키는 손님과 직원 사이의 시비가 벌어질 때 출동해 상황을 정리하는 역할도 한다. 88세의 어르신이 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는 노장의 이야기에는 삶의 경륜이 묻어난다. 임갑지 할아버지와 같은 해, 미국 애틀란타에서 태어난 제인 리틀은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저음을 맡는 더블베이스 연주자이다. 지난 2월에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미 주요 언론은 그녀의 기념비적인 행적을 보도했다. 미국 메이저 악단인 애틀란타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71년 동안 몸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만 87세를 맞은 고령의 단원이 프로 교향악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기록이다. 제인 리틀의 기록은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많은 청중들의 갈채 속에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다. 1945년 2월 4일 애틀란타 심포니의 전신이었던 애틀란타 유스 심포니의 창단 멤버로 첫 무대에 섰던 제인 리틀은 71년 동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론 코플랜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로버트 쇼와 같은 전설적인 지휘자들을 비롯한 수 많은 거장들과 무대를 함께 했다.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자신의 악기를 직접 운반할 정도록 열정이 넘쳤다. 작년 가을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종으로 몇 개월 동안 오케스트라를 떠나있던 그녀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제인 리틀은 지난 주말 있었던 팝스콘서트 무대에도 변함없이 올라 예정된 모든 곡목들을 소화했다. 쏟아지는 관객들의 환호에 지휘자는 다시 지휘봉을 들었다. 이 공연의 마지막 앵콜은 ‘There’s No Business Like Show Business’였다. 1946년 쓰여진 한 뮤지컬에 등장하는 이 곡은 제목 그대로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4분 남짓되는 이 곡이 연주되던 중 더블 베이스를 연주하던 제인 리틀은 무대 위에서 주저 앉았다. 모든 예술적 에너지와 영감을 다 쏟아 놓았던 그녀는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87년 간의 인생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무대 위에서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CNN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들은 가치있는 삶을 살았고 더불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숭고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제인 리틀의 삶을 재조명 했다.

2016-05-27

[클래식 TALK] 거장의 첫 걸음

수 년 전 디트로이트 공항에 친숙한 얼굴이 모델로 등장한 초대형 광고판이 걸렸다. 피아니스트 랑랑(Lang Lang)이었다. 클래식 음악가로서 그가 가진 젊은 에너지와 천재성이 대중적 인지도와 결합되어 커다란 상품 가치를 창출한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 차이가 있겠지만 랑랑이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피아니스트 중 선두에 섰다고 말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전 세계에 방문해보지 않은 나라가 없고 서보지 않은 콘서트홀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몸값 역시 최고 수준이다. 그의 활약상은 단지 콘서트홀에만 얽매이지 않고 굵직한 세계적 이벤트의 주인공로 등장하는 등 클래식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제로 그는 늘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만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다. 또 한 명의 대세 음악가를 말하라면 유자 왕(Yuja Wang)이다. 6살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10살이 되었을 때 이미 음대에 진학할만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 후 영재들만 들어간다는 커티스 음대를 졸업하던 2008년 당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수장이었던 사를르 뒤뜨와(Charles Dutoit)의 후광으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줄줄이 접수(?)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단박에 대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2011년 할리우드보울에서 열린 LA필하모닉과의 협연에서 연주자들이 통상적으로 입는 드레스를 버리고 뾰족한 하이힐에 몸에 붙는 붉은색 미니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 옷차림으로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이 무대 직후 LA타임즈는 물론 유럽과 뉴욕 그리고 한국 언론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선보였던 라흐마니노프보다는 이날 입은 파격적인 의상에 대한 갑론을박이 보도되었다. 유자 왕의 신기에 가까웠던 이날 연주에 대한 평가는 부차적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젊은 연주자들이 각광을 받는 시기가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대중들의 관심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은 어쩌보면 당연한 일이다. 실력과 매력을 가진 천재들이 계속 쏟아지기 때문이다. 필자의 10대 시절 전 세계를 호령하던 음악가들 가운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매니지먼트는 좋은 연주자보다는 새로운 매력을 가진 '차별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상품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떠나보낸다. 한 예로 유명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자리에 오른 한 지휘자가 구설수에 휘말리며 떠나게 되자 자기 회사 아티스트 명단에서 빼버린 일도 있었다. 상황은 변했고 이해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 주목을 받는 것보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활동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증명하는 예가 있다. 피아니스트 매너햄 프레슬러(Menahem Pressler)는 피아노 실내악 연주에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보자르 트리오의 창단 멤버로 수십 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의 연주가 담긴 음반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의 해석은 교과서이자 표본이 되었다. 프레슬러는 1923년생 한국 나이로 올해 93세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지금까지도 젊은 시절 못지 않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2015년 신년 음악회의 독주자로 그를 초청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총명하다. 건반을 유유히 걷는 깊은 주름 박힌 투박한 손의 극명한 대비가 빚은 모차르트를 그 누가 흉내낼 수 있을까? 그는 60년 동안 교수로 재직중인 인디애나대학교를 중심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 오케스트라 협연 리사이틀 그리고 실내악 연주와 마스터클래스에 이르기까지 20대의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벅찬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연주와 연주 사이에 하루 이틀 시간이 생기면 인디애나로 날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시 돌아오는 일도 다반사다. 웬만한 연주자는 60세 길면 70세 정도쯤 활동을 중단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주로 집중을 하지만 그에게 93이라는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연주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연습에 매진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프레슬러의 평소 연습량은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거장의 자리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2015-04-23

[클래식TALK] 콩쿨의 아이러니

2013년 독일 뮌헨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당시 순수 국내파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김봄소리가 ARD 콩쿨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특별상과 더불어 현대음악 연주상까지 거머쥔 쾌거였다. 사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한 문화재단 영재 연주자로 선정되어 미래가 예측되었던 연주자였다. 지도교수의 권유로 국내외 콩쿨에서 입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지금은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대회의 문턱을 넘나드는 실력파로 주목을 받고 있다. 콩쿨은 누가 심사하는지를 보면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경력 인종 성별 등을 고려해서 최대한 다양한 심사위원단을 구성한다. 요즘은 상금도 꽤 커서 우승자에게 5만 달러를 주는 대회도 수두룩하다. 여기에 주요 음반사에서 레코딩과 마케팅을 해주는 것을 부상으로 걸기도 하고 수상자가 경력을 쌓아갈 수 있도록 크고 작은 연주 기회를 연결시켜주는 매니지먼트 협약을 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미국과 유럽의 유명 콘서트홀에서 데뷔 연주를 주선해주고 주요 언론에 평론 기사가 나올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명한 콩쿨에서 입상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 년 전 필자의 지인 H가 한 국제 콩쿨에 참가했다. 워낙 실력있는 피아니스트라 예선을 거쳐 결선무대까지 무난하게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입상자 명단에 오르는 데는 실패했다. 그녀는 아쉬움을 달래며 결과를 받아들였다. 콩쿨이라는 것이 그렇다. 듣는 사람의 귀가 다르고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회를 마친 후 심사위원 한 명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견을 들었다. 다름 아닌 그녀의 외모에 관한 부분이었다. H는 일반인들에 비해 체격이 큰 편이었는데 당사자 앞에서 상품성을 운운하면서 독주자로서의 자질을 논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비주얼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매니지먼트도 아닌 실력을 겨루는 콩쿨에서 '실력은 둘째'라고 대놓고 인정하는 것이 못내 씁쓸하다. 콩쿨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콩쿨식'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또 다른 지인 S가 국제 콩쿨 결선무대 문턱에서 좌절을 맛본 후 한 심사위원이 그를 위로하며 격려했던 이야기는 이렇다. "당신의 모차르트 연주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콩쿨에서는 단정하고 순전한 해석보다는 공격적인 표현에 사람들은 더 열광합니다. 콩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S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소리를 가졌다. 바로 이 점이 S의 장점임에도 불구하고 콩쿨에서는 잘 통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TV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화려한 편곡과 극강의 고음을 뿜어내는 가수들만이 끝까지 살아남는 것처럼…. 사실 이름있는 음악가들 가운데 콩쿨을 거치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이런 저런 이유로 콩쿨을 거부하기도 한다. 콩쿨로 인해 음악가들이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제한해버리는 폐해가 있기도 하고 입상자들 가운데는 시간이 흘러 새로운 입상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또 다른 굴레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화려한 입상 경력을 운운하며 웬만한 음악가가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노골적인 선긋기를 하기도 한다. 이 정도라면 콩쿨은 해악이다. 적어도 음악가들에게는. 콩쿨이 또 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음악 자체에 집중하게 하는 순기능이 더 부각되고 많아져야 하는데 말이다. 지난 달에 현재 뉴욕에서 공부하는 유학 초년생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함께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량을 뽐낼 독주 무대가 아닌 앙상블 단원으로 비슷한 또래 20여 명과 함께 연주했다. 연주를 마친 후 그녀로부터 좋은 사람들과 알게 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유쾌하게 연주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문득 한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에 있는 동안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 '어울려' 연주하고 싶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팀 안에서 조화로운 모습으로 연주에 임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콩쿨을 통한 득과 실이 있지만 연주를 즐길 수 있는 음악가라면 그 양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2015-04-09

[클래식TALK]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다

얼마 전 월스트릿저널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조회수가 한계치를 넘어서 유튜브 집계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다는 구글의 발표를 경이적인 일이라고 소개했다. 현재 '강남스타일'의 조회수는 약 23억 건 정도인데 유튜브의 설계 당시에는 약 21억 건의 조회수를 넘어서는 영상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강남스타일'이 기존의 틀을 깨버렸으며 인터넷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데뷔 10년차 신인가수'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했었던 싸이는 이 곡 하나로 세계를 아우르는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숱한 화제를 만들어내는 이슈 메이커로 말 잘하고 성격 좋은 동네 형 같은 친숙한 이미지로 자신의 입지를 다진 만능 연예인이긴 했지만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적도 없고 '강남스타일'이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위 '내수용' 비디오가 소문에 소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전작 만큼은 아니지만 후속으로 발표된 '젠틀맨'이나 '행오버' 같은 곡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싸이가 유튜브의 주인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클래식 음악에도 유튜브로 '뜬' 스타 음악가들이 있다. 피아니스트 임현정(HJ Lim)이 대표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그녀는 고국에 있는 부모님들을 위해 연주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그 가운데 화려한 기교로 연주한 짧은 영상이 입소문을 타면서 현재 50만여 건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세계 굴지의 음반사인 EMI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 앨범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대담한 신예'로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 밖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 빌보드 클래식음악 차트 1위에 오르게 되는 주인공이 되었다. 오디션이나 콩쿨에서 극소수의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을 통해 신인이 발굴되어 왔던 시대에서 컴퓨터 앞에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의 다양한 참여로 스타가 만들어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된 것이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인터넷 동영상은 단순히 한 개인이나 행사를 알리기 위한 옵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매우 중요한 플랫폼이 되었다. 독일의 자랑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009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콘서트홀(www.digitalconcerthall.com)을 런칭하고 동영상 콘서트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년에 40회 이상의 공연 실황 중계는 물론 다시 관람할 수 있는 음악회와 인터뷰도 수백 개에 달하며 컴퓨터 블루레이 태블릿 스마트폰 등의 모든 환경에 최적화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정기회원의 70%정도가 외국인들이라는 점은 최적화된 테크놀러지를 통해 장소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말해준다. 실제 맛배기로 올라온 디지털 콘서트홀의 연주를 처음 접했을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에 가까웠다. 영상과 음질은 물론이고 전문적인 카메라 기술이 실제 음악회장에서 감상할 때와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에 한 술 더 뜬 메트 오페라는 온라인을 통한 실황 중계는 물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71개국 영화관 스크린에까지 손을 뻗쳤다. 즉 메트 오페라 공연을 보고 싶다면 집 근처 상영관을 찾아가면 되고 이는 거창한 오페라 공연이 영화 한 편 보는 수준의 접근성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음악회를 알리기 위해 포스터나 홍보물에 의존하지 않고 온라인 마케팅으로 옮겨간 지 오래다. 주요 소셜 미디어 업체들은 이를 위한 다양한 플랫폼과 솔루션을 발빠르게 제공한다. 유럽의 한 오케스트라는 세계 굴지의 태블릿 컴퓨터 제작 회사와 손을 잡고 종이 악보를 태블릿으로 대체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더 이상 종이에 펜으로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컴퓨터에 그려진 음표들은 상상력이 아닌 실제 소리로 들려진다. 약간의 기술적 조작이 뒤따른다면 실연에 가까운 꽤 그럴듯한 사운드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보로메오 현악사중주단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종이악보 대신 랩탑과 페달을 사용해오고 있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 클래식 음악계에도 테크놀러지의 바람이 불어온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빼고는 시대를 설명할 수 없는 요즘 클래식 음악도 적극적인 발맞춤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2015-03-26

[클래식TALK] 경청과 소통의 예술,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뉴욕에서 연주 단체를 세운지 6년 째 접어들다보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에는 주로 만남을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종종 만남을 요청받기도 한다. 저명한 아티스트와 합동으로 공연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는가하면 좋은 연주자를 어떻게 섭외했는지 알려달라는 상담 요청도 받는다. 아예 특정 아티스트를 지목하고 개인 e메일을 내놓으라며 연주료는 얼마나 줬는지 대놓고 말하라는 막무가내도 있었다. 참고로 아티스트와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부분 중 하나는 개인정보와 돈에 관한 부분이다. 출연료는 누설금지 제1조항이고 개인 e메일은 반드시 본인 동의를 구한 후 공유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아티스트를 섭외할 때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해도 매니지먼트를 통해서 진행한다. 명망있는 인물 중에는 각 대륙마다 매니저를 두기도 하는데 피아니스트 손열음 같은 경우도 유럽 일본 한국에 각각 공연관련 스케줄을 돕는 매니저가 있고 조수미나 정명훈 같은 특급 아티스트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륙을 넘나들면서 계속 떨어지는 테트리스 게임의 벽돌처럼 빡빡한 일정의 공연을 해야하는 유명 아티스트들에게 연주 조건이 어떤지 연주료는 얼마인지 리허설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일일이 직접 챙기기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이런 뒤치닥거리(?) 이외에 매니지먼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있다면 연주를 섭외해 오는 것이다. 연주 단체들을 위해 소속 아티스트 소개 자료를 제작하고 공연 제안서를 보내 연주 기회를 따내는 역할이다. 연주가 많아진다는 것은 공연 수입이 늘어난다는 경제 논리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 연주자들의 경우 어떤 매니지먼트에 소속되었는지가 연주자로서의 성패 여부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반대로 이름 있는 아티스트들은 쏟아지는 초청 러브콜을 선별해야 하는데 이를 잘 조정하는 것이 생각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NYCP)의 첫 번째 시즌이었던 2011년 첼리스트 M과 함께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M과는 유학 시절 아파트 윗층과 아래층에 함께 살기도 했고 학교 오케스트라에도 같이 속해 있었다. M은 졸업 후 세계적인 첼로 콩쿨과 권위 있는 음악상을 차례로 휩쓸며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첼리스트 요요마를 대신하여 무대에 서기도 했고 젋은 나이에 유럽의 전통있는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초빙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로 틈틈이 독주 무대를 갖는 인물이었기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NYCP의 협연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오랜만의 연락에 반가워하며 흔쾌히 연주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곧바로 연주 곡목과 날짜 장소 등에 대해 구두협의를 마치고 다시 연락하자는 여운을 남겼다. 시간이 흘러 M과의 연주가 다가올 무렵 한 통의 e메일이 도착했다. 그의 매니저였다. 다시 연락하자는 그의 이야기가 골치아픈 현실이 되었던 이유는 계약서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 계약서에는 '나중에 꼭 같이 연주하자'는 옛 친구와의 우정과 약속은 온데간데 없고 다섯 자리 숫자만이 '우린 절대 떨어질 수 없어!'라며 냉정하고 뻔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 NYCP는 그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중부에 거주했던 M은 이 연주를 위해 개인 일정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면서 여행 계획을 잡아둔 상태였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연주를 코 앞에 둔 마당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특급 매니지먼트사 가운데에는 악명 높은 곳도 있다. 회사 명성에 비해 대우도 형편없는지 직원들이 수시로 바뀐다. 지인 한 명도 이 회사에서 슈퍼스타급 아티스트를 돕는 일을 잠시 하더니 일을 정리하고 회사를 나왔다. 이런 곳은 돈이나 명성이 아니면 대화가 어렵다. 반면 유능한 매니저는 이런 황당한 순간을 지혜롭게 리드해나간다. 다행히 M의 매니지먼트 베이스가 뉴욕에 있어서 맨해튼에서 미팅을 갖고 현실적인 수준의 협상을 했다. 음악회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M과의 옛 약속은 멋지게 이루어졌고 언제라도 다시 부르면 꼭 오겠다는 확답도 받았다. 유능한 사람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이 아니다. 능동적인 자세로 경청하며 꾸준히 소통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M의 노련한 매니저를 통해 배운 교훈이다.

2015-03-12

[클래식TALK ] 파보(Paavo)의 미덕

요즘 대세가 누구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꼽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바로 에스토니아 출신의 지휘자 파보 예르비(Paavo Jarvi)다. 현재 가장 바쁜 일정과 연주를 소화하는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전 세계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그는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명 지휘자로 잘 알려진 아버지 네메 예르비와 동생 크리스찬 예르비와 더불어 세계 지휘계를 '접수'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음악감독으로 이끌었던 신시내티 심포니를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표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고 독일과 프랑스의 주요 악단을 비롯해 최근에는 일본의 NHK교향악단의 수장에 오르며 그의 주가를 확인시켜 주고있다. 2004년부터 음악감독직을 맡아온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과 함께 소니를 통해 출반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은 오늘날의 화법을 담은 명반으로 평가되고 있다. 베토벤의 작품을 혁명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 200여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마르고 닳도록 연주되었다. 명반으로 꼽히는 한 둘을 제외하고는 '그 놈이 그 놈'인 셈인데 유독 그가 지휘하는 베토벤은 다르다는 평가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브루크너 말러 슈만 닐센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권위있는 음악상을 휩쓸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다. 이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차적 목표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구성원들 모두 연주를 통해 소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지휘자다. 소규모 앙상블이나 챔버 오케스트라 중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곳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지휘자는 단체의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주 대신 듣는 일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지휘자는 음악을 제대로 듣는 사람이어야 함과 동시에 자신이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함께 악단을 이루는 다른 사람들과 잘 소통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잘 하는 지휘자는 좋은 리더의 기본 조건을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05년 필자가 오스트리아 한 재단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와 빈에 약 두 달 여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당시 막 음악감독직에 올랐었던 파보가 이끄는 도이치 캄머 필하모닉의 공연이 있어서 관계자의 허락을 얻어 연주 직전 무대 리허설을 찾아갔다. 그날 저녁 무대에 올려질 곡목은 교향곡 8번과 피아노 협주곡 4번 모두 베토벤의 곡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파보를 네메 예르비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던터라 그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독일의 챔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지휘 포디움에 올라 리허설을 진행하던 파보는 자신이 들은 것을 바탕으로 단원들에게 몇 가지 주문을 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관객쪽으로 돌리더니 부지휘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보았다. 부지휘자는 목관악기가 더 선명하게 들리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파보는 그의 의견을 따라 목관악기 연주자들에게 그 부분이 다른 소리들에 묻히지 않도록 신경써서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과정은 리허설 내내 반복되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한 손으로 지휘를 하면서 고개는 뒤로 돌려 부지휘자의 반응을 살피기까지 했다. 여느 지휘자들처럼 전반적인 사운드가 어떤지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차원이 아니었다.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며 엄격한 소통이 일어나는 현장이었고 이 때 만큼은 부지휘자의 의견을 단원들에게 전하는 메신저에 불과했다. 성서의 교훈 가운데 '믿음은 귀 기울여 듣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듣기 위해 존재하는 그가 굳이 부지휘자의 귀에 의존했던 이유가 있다. '내가 어떻게 연주하고 있는가?'와 그것이 실제로 관객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파보의 미덕은 이 괴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내가 하면 모든 것을 잘 듣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알 수 없는 바깥의 소리에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듣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파보와 같은 리더가 이 시대에는 더욱 필요하다.

2015-02-12

[클래식TALK] 예술혼의 광장에서

몇 년 전 친구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LA타임스 기사가 담긴 e메일이었는데 KBS교향악단에 관한 보도였다. 내용을 보았더니 당시 신임 음악감독과 단원들과의 마찰에 대한 보도였다. 미국의 주요 언론이 보도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만큼 이 사태는 당시 한국 음악계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정기연주회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양측의 갑론을박 논쟁이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결국 오케스트라는 KBS라는 둥지를 떠나 법인화의 운명을 맞이했고, 새로운 음악감독이 선임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단원들의 이미지는 추락했고 이에 실망한 관객은 연주장을 떠났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음악가들 역시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일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크다. 그렇기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나 천재 음악가들과 일할 때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특별한 사람과의 교감이 예술적 자양분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그렇다. 쿠르트 마주어와의 만남이나 랑랑과의 리허설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가까이서 한 번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영감(靈感)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존경할만한 인물로부터 생기는 신뢰도 있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실연(實演)을 들어보지 못하더라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술혼을 불태우게 만드는 사람을 만날 때 음악가들은 가슴이 뛴다. 올해로 95세를 맞는 줄리아드 현악사중주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로버트 만(Robert Mann)이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가들은 자기 자신이 제대로 평가 받는다고 생각될 때도 신뢰가 형성된다. 그렇다고 몸 값이 단순히 돈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연주료를 적게 받거나 아예 한푼도 받지 못하더라도 저명한 연주자나 단체로부터 연주 의뢰가 들어오면 자신의 가치가 매겨지게 된다. 중요한 자리를 빛낼 수 있도록 초대되는 것 역시 자신의 몸값을 증명한다. 바로 신뢰가 형성되는 현장이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수준에 못미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단체와 함께 연주하게 되더라도 파격적인 대우가 보장될 때 신뢰가 생겨날 수 있다. 명예도 영감도 아니라면 실질적인 이득을 따라가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이기 때문이다.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이런 조건들이 얼마나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어가는가가 중요하다. 유명세만 쫓아가다는 실속 없이 헛바람만 들 수도 있고, 돈에만 목숨 건 속물 취급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부분을 챙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KBS교향악단의 내홍이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지난 12월에는 안타깝게도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항명 파동인가 싶더니 전 대표의 부도덕적성과 비인격적인 대우가 도마 위에 올랐고, 이어 불똥이 정 감독과 임명권자에게 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번져나갔다. ‘누가 잘못했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그게 정말 잘못인가?’까지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따져야 할 변수들과 여러 유기적인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모인 공동체를 이론과 원칙에 따라 운영하는 것과 실제로 경영하는 것은 다른 사안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생각보다 큰 간극이 존재한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곳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순진무구한 불평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인 자료와 숫자까지 제시하는 주장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지며 맹렬하게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자기 중심으로부터 출발하고 그에 따라 성급하게 결론을 짓기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비판을 하는 쪽도 당하는 쪽도 차분하고 냉철해야 한다. 소설가 정이현은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는 비밀스러워도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막상 그 사람을 부모님께 인사시키는 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예술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이것이 구현되는 현장에 서게 되면서 다른 차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 예술혼이 광장에 세워졌을 때 대중들이 납득할 수 있을만한 사회적인 합의가 마련되어야 하고, 또 마땅히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김동민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 음악감독

2015-02-10

[클래식TALK]사라진 악기

몇년 전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샌드위치 가게에서 악기를 도난당했다. 도둑맞은 바이올린은 18만 달러(약 18억원)를 호가하는 유명 악기였다. 게다가 바이올린과 함께 보관되어 있던 10만 달러(약 1억원) 상당의 활 두 개까지 함께 잃어버렸으니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될 만 했다.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도난당했던 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이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400여 대 밖에 남아 있지 않은 혈통있는 명기로 연주 가능한 상태로 보존된 악기는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보험회사는 도난당한 바이올린을 찾기 위해 약 5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얼마 후 악기를 훔쳐간 3인조 도둑은 런던 경찰에 체포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올린의 실제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던 좀도둑들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150달러에 팔려고 했다가 덜미를 잡혔다니 말이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Yo-Yo Ma)도 악기를 잃어버릴 뻔한 끔찍한 경험을 겪었다. 1999년 음악회를 위해 뉴욕을 방문 중이었던 요요마는 카네기홀에서 열렸던 공연을 마친 후, 호텔로 돌아가던 중 타고 왔던 택시 트렁크 안에 본인의 첼로를 둔 채 그냥 내리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당시 그가 사용하던 첼로 역시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당시 가격만 하더라도 300만 달러에 달하는 초고가의 악기였다. 특히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만든 쓸만한(?) 첼로는 현재 손에 꼽을 정도로 몇 대 남아있지 않다. 악기를 차에 두고 내린 것도 큰일이었지만 다음날에도 연주를 해야하는 상황이라 더 심각했다. 맨해튼을 질주하는 택시를 일일이 검사할 수도 없고, 이보다 훨신 더 위급한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뉴욕 경찰이 한 사람의 분실물을 찾기 위해 특별한 시간을 내 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경찰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악기의 행방을 추적했다. 요요마가 택시 요금을 지불할 때 무심코 받아둔 영수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택시 운전사는 자신이 태운 손님이 누구인지도, 트렁크에 실렸던 짐이 300만 달러 짜리 첼로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악기를 찾아 남은 음악회를 무사히(?) 마치긴 했지만 자신의 분신이자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악기를 잊어버리고 택시에 두고 내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얼마 전 뉴욕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맨해튼에 거주하는 한 피아니스트는 출타가 잦아지면서 서블렛 광고를 냈다. 글을 보고 찾아온 입주인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내주었고 그는 집을 비우게 되었다. 당시 집 안에는 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비롯해서 몇 가지 값 나가는 물품들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서블렛을 준 입주인이 잠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피아니스트가 뉴욕에 돌아왔을 때 그랜드 피아노를 비롯한 집안 물건들은 입주인과 함께 사라진 뒤였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14만 달러를 호가하는 분실된 피아노가 롱아일랜드의 한 피아노 배송 업체에 보관되어 2만 달러 헐값에 팔려 샌프란시스코로 배송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가족들의 권유로 잠적했던 입주인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피아노는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 유명 음악대학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주관하는 외부 음악회가 있어서 피아노를 운반하는 전문가가 학교를 찾았다. 전문 음악회장에서나 사용되는 그랜드 피아노(concert grand piano)를 운반하기 위해 학교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악기를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학교에는 어떠한 외부 행사 계획도 없었다. 배짱 두둑한 도둑은 행사를 빙자해 악기를 유유히 빼돌리는 간 큰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음대는 보안 요원에 의해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피아노가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쉽게 훔쳐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도둑은 이런 황당무계한 사건을 뻔뻔하게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 악기를 분실했던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 찾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파다하다. 대학교 동아리 방에 굴러 다니는 고물 통기타를 도둑 맞아도 가슴 아플 터인데, 200만 달러 짜리 명기가 150달러에 어이없이 팔려나간다면 그 악기 주인의 심정은 어떨까? 연주자들에게 악기는 또 다른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기와 가격에 상관없이 그 존재만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김동민 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

201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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